만화 책방에서 한권 대여비가 200원 하던 시절.
나는 책방을 들락거리며 엄청나게 만화책을 보곤 했다.
그 당시 유명한 작품들을 모두 섭렵했고,
동네 책방 주인들과는 매번 친구처럼 지내며 마니아틱한 작품들도 꽤 많이 손을 댔었다.
만화가 다루는 다양한 소재에 열광하고,
단 한 컷으로 이야기 하는 스토리텔링의 매력에 빠져 청소년기를 보냈더랬다.
그 시절 모든 부모님이 아마 비슷하셨을 터.
그냥 책도 안보는 딸년이 만화책을 끼고 살고, 책상에 쌓아두고 보는 꼴이 맘에 드셨을 리가.
어린 시절 필자는 등짝을 맞는 건 태반이었고, 만화책을 가지고 엄마와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침대와 벽 사이에 살짝, 책장에 티 안 나게 매복은 물론이고, 표지를 바꿔보기도 하는 꼼수를 부려보기도 했는데...
그땐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찾아내시던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평수도 뻔한 내 공간에 완벽한 비밀장소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을지도.
허나, 수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난 꽤 많은 작품들을 섭렵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8할은 그때이다.
(아마 그래서 내 인생이 망... 흠흠)
여튼, 나의 만화에 대한 지식은 꽤 해박한 편이었고,
대학 친구 A는 아직도 가끔 술 한 잔 할 때 마다 그 때를 이야기 한다.
동아리 방에서 아이들과 만화를 가지고 수다 떨던 그때.
- 그 있잖아. 제목이 빨간색 이미지 였는데...
- 아, 하늘은 붉은 강가?
- !!!
앞 뒤 서브 텍스트도 없이 맞춰버린 제목.
15년이나 지나도 안주가 되는 그날의 기억.
단어 하나에도 작품을 알아맞히는 아이, 그게 나였다.
그렇게 만화 작품을 줄줄이 꿰던 나는 대학에 가서 미드를 만났고, 그 관심은 온전히 미드로 향했다.
미드의 백과사전으로 한 10년 살던 나는 현재 푹 빠져 지내는 것이 크게 없다.
이제 그만큼의 열정이 사라졌거나, 이제 그 정도로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이 없는 것일지도.
웹툰도 만화인데 예전만큼 빠져 보지 않는 건, 손끝 꺼끌한 책장을 넘기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아.. 옛날 사람.
처음으로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어, 넷스케이프 등의 브라우저가 처음 등장했을 때,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첫 웹툰 <버저비터>를 웹에 연재했었다. 그림 하나 뜨는데 5분이 걸렸던 그 웹툰을 챙겨보면서 만화책의 시대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건만... 꺼끌한 종이 질감들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었을까.
아, 서론이 너무 길었다.
웹툰 시장의 발달로 수많은 작품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지고 있다. 나는 그 중 매주 챙겨보는 몇 개의 작품들이 있고, 빅 재미까진 아녀도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작품들도 있지만 <미생> 이후, 특정 요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작품은 아직까진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만났다. 다음웹툰 <4학년>
허리가 아파 누워서 하릴없이 폰만 뒤적이고 있던 때, 우연히 본 1회에서 두 눈이 번쩍. 흡입력 있는 첫 화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4학년. 나이로 따지면 11살. 어린이긴 한데 마냥 어린이일 수는 없는 나이.
10살인 조카와 함께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이 아이는 어른의 세상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겉모습은 한없이 아이이지만 가끔씩 보이는 어른의 모습.
그 간극에서 오는 당혹감은 보통 귀여움으로 해석되고 끝이 나지만, <4학년>에서는 그 당혹감을 공포심으로 밀도 있게 풀어냈다.
초등학교 4학년 교실.
정미린 선생님을 좋아하는 우빈이의 미친 행각들.
처음엔 단순히 아이니까 하고 넘어간 행동들이었지만
단순한 의구심이 확신이 되었을 땐, 정선생은 이미 11살짜리가 놓은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도 선생님이니 아이를 품어줘야겠다던 순진한 생각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야기가 전개 되며 학부모, 기자, 동료 선생 심지어 가족과 애인까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수렁으로 몰고 있어 보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혔지만 그녀의 위기를 눈치 채고 옆에서 돕는 동료 김윤우 선생님이 있다는 거 하나로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로.... 완결이 ‘아직’ 이라는 점.... ㅠㅠ
너무 궁금해서 수요일마다 결제해서 보고 있지만 쭉쭉 이어봐야 하는 나의 성격상 아주 울화통이 터질 지경. 아주 오랜만에 다음이 기다려지는 작품이다. 이야기가 '너무'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서 공감대를 너머 정 선생의 불안이 나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느낌이 강하다. 첫 장면에 등장한 정 선생님의 조카 장면이 왠지 모르게 복선마냥 계속 불안으로 이어지는 건 왜인지.
좋은 장면이 여럿 있지만, 첫 화에서 소름 돋았던 장면을 오늘의 한 장면으로 꼽겠다.
p.s
이걸 보면서 문득 교사로 일하고 있는 대학후배가 생각이 났다.
- 언니, 우리 때 학교랑 지금의 학교는 많이 달라.
그녀의 고단한 눈빛과 얕은 한숨이 떠올랐다. 교사로서의 큰 꿈을 안고 학교로 향했던 그녀는 나에게 다 이야기 하지 못할 수많은 경험들을 했겠지. 그녀에게는 차마 보라고 추천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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