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해외에서 출판된 어떤 책을 보고 빵 터진 적이 있었다. 바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너무도 진지하게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기술하는 일종의 생존 전략서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만들었지? 싶었는데, 단순히 웃으며 넘길 일은 아니었다. 이 책이 엄청나게 많이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 책의 저자는 맥스 브룩스. yes24의 저자 설명엔 ‘좀비 르네상스의 창시자’라고 쓰여있다. 이 문장을 보고 한 번 더 빵 터졌지만, 그가 <월드 워 Z>의 원작 소설의 저자임을 알게 되었을 땐 그냥 웃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좀비 르네상스의 창시자가 맞았다.
개인적으로 좀비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 내에서 대량으로 피가 튀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렇다고 몽글몽글한 로맨스를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좀비 영화를 찾아서 볼 정도의 마니아는 아니었다. <월드 워 : Z>도 그저 빵 오빠의 출연이 궁금해서 시작했을 뿐.
좀비물이 거의 처음이었던 나에겐 이 영화의 스피드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좀비란 느릿하게 걸어오는 그런 존재였다. 가뜩이나 공포스러운 존재인데 뛰기까지 한다고? 만약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대단한 쫄보인 내가 과연 도망칠 수나 있을는지. <월드 워 Z>에서 미친 듯 달리기 시작하는 좀비를 보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난 얼어버리고 말았다.
나에게 좀비 영화는 저예산 영화라는 인식이 강했었다. 감독들이 저비용으로 자신의 연출력을 가장 밀도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장르가 공포이고, 그 공포 중에서 특히 좀비 물이 가장 상위에 있었으니. 하지만 <월드 워 Z>말 제목처럼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였다.
줄거린 간단하다. 갑작스럽게 창궐한 좀비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인류가 맞이한 대재앙에 군인 출신의 UN 조사관 제리(브레드 피트 역)는 가족과 함께 좀비를 비해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가족을, 인류를 구하기 위한 전쟁에 앞장서게 된다.
이야기의 구조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연출은 세밀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영화의 경우 세트를 얼마나 잘 때려 부숴버리냐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전쟁을 설명하는 방식이 세밀하지 않으면 단순히 CG를 잘 썼다고 해서 세트를 기깔나게 날려버렸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진 않는다.
<월드 워 Z>는 극찬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섬세한 연출을 훌륭하게 해냈다.
첫째로, 초반 좀비가 창궐하며 바이러스가 퍼지는 광경을 설명함에 있어, 장난감에 녹음되어 있는 메시지 카운트다운으로 멀쩡한 인간이 바이러스에 어떻게 감염되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너무 훌륭했다. 이미 초반부터 이 장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기에 그 힘으로 영화의 마지막까지 쉬이 달릴 수 있었다.
둘째로는 좀비의 약점을 발견하는 장면. 수많은 좀비 떼가 장님 노인과 아픈 아이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여주는 씬이 있는데, 그 장면은 너무 훌륭한 연출까진 아니었지만 대단한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엑스트라 비용 많이 들었을 텐데... 뭐 빵 오빠가 제작했으니 돈 걱정은 안 했겠지...
물론, 초반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후반의 실험실에서의 바이러스 탈환 시퀀스는 텐션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또한 그놈의 펩시. PPL 티가 너무 났단 말이지. 뭐, 요즘 엄청나게 까이는 <살아있다>에 비하며 양반 중의 양반이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우리의 빵 오빠 제리가 자신의 몸에 바이러스를 직접 주입하고 좀비 사이를 지나쳐 다시 실험실로 돌아오는 장면은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좀비는 있을까? 예전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그 존재를 그냥 해태 같은 상상 속의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어쩌면 좀비는 단순히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전 세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지켜야 하는 것도 가족이다. 수많은 좀비 떼에서 두 딸과 아내를 지키려는 제리를 보며 난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우리 아버지도 우릴 지키시려 고군분투하시겠지... 제리의 행동에 아버지가 겹쳐 보이며 중간에 괜히 뜬금없이 울컥하기도 했으니...
잊을만하면 한 번씩 돌려보는 영화인데, 이미 다 알고 다 봤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쫄깃한 느낌은 매번 여전하다. 코로나가 심각하게 다시 창궐했을 때, 한 번 더 영화를 보았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왠지 좀비 아포칼립스와 대단하게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이 팬데믹 상황이 얼른 종결이 되길 바라지만... 영화에서 백신을 비교적 빠르게 발견하고 해결한 것처럼 우리의 상황도 그렇게 빠르게 해결되길 바랄 순 없겠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해결을 바라본다. 마스크 없는 세상. 제발 얼른 다시 오길 바라니...
이 글을 마치면 이 영화를 한 번 더 감상하게 될 것 같다. 쫄깃함을 원하는 자여, 좀비물을 좋아하는 자여 그대에게 <월드 워 Z>를 추천하는 바.
+) 가장 빡쳤던 장면은 이스라엘 시퀀스. 높은 벽을 쌓고 국가를 요새화 시켜 좀비를 막아온 이스라엘의 국경으로 향한 제리를 보여주는 그 장면! 그곳엔 이스라엘로 입성한 자들이 현재를 자축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기들이 만든 시끄러운 소리가 좀비들을 자극하는 줄도 모르고 날뛰는 장면에서는 너무 울화가 치밀어서 원. 제대로 좀비를 몰랐던 무지가 불러온 참극을 보며 현재 우리가 겪은 몇 장면이 떠올랐다. 아 깊은 빡침이여. 영화나 현실이나 인간을 빡치게 하는 건 인간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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